글로벌 가전제품 제조사 '일렉트로룩스Electroulux'는 새로운 서비스 도입에 앞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서비스 아이디어는 세탁기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신 스마트 기술을 이용해 세탁기 사용 횟수에 따라 비용을 청구한다는 방식이었다. 제공되는 세탁기는 전력 소모가 적고 무료 업그레이드도 가능하며, 자체 진단 기능이 장착되어 고장 시 수리도 빠르게 가능한 프리미엄 제품이었다. 이런 세탁기를 무료로 마련할 수 있다고 하니 당연히 많은 고객들이 이 방식에 찬성 표를 던졌다. 일렉트로룩스도 긍정적인 설문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스웨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실시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무료 세탁기에 대한 수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프로젝트는 베타 버전을 통과하지 못하고 급하게 중단되고 말았다.
일렉트로룩스의 프리미엄 세탁기 / 출처: 일렉트로룩스 공식 페이스북
많은 마케터들은 이 결과를 그저 소비자들의 생각과 실제 행동 사이 불일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 속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소비자의 '소셜 아이덴티티 Social Identity(사회 정체성)'이다.
소셜 아이덴티티란?
사람은 본디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며,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관계 그룹', 즉 '사회 그룹'에 따라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 천주교, 유대교, 힌두교 등 종교에 따른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고, 미국인이냐 한국인이냐를 따지듯 국적에 따른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다. 교수, 음악가 등 직업에 따라서도 정체성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 모든 그룹들의 정체성이 동시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부산 사직 구장에서 부산 갈매기를 열창하고 있는 사람이 응원 중에 천주교 신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창 예배 중인 교회 안에서 느닷없이 자신이 롯데 자이언츠 팬임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출처: 롯데자이언츠 공식 페이스북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자.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사람도 제각각 소셜 아이덴티티가 다르다. 다 같은 '장 보는 사람'으로 퉁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요리사로 정의하며 장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를 생활비를 관리하는 가족구성원으로 정의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손님을 초대한 마음씨 넉넉한 집주인일지도 모른다. 결국 핵심은 물건을 구매하고자 마음먹은 순간 자신이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 순간의 소셜 아이덴티티가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일렉트로룩스는 어디서 실수를 한 걸까?
일렉트로룩스 사례로 돌아가 보자. 설문조사는 소비자 연구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설문에 응답하는 행동은 참여자로 하여금 '시장조사 응답자'로서의 정체성을 띠게 한다. 응답자들은 제안된 서비스를 '이성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판단한다. 설문 응답자의 정체성에 맞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응답자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또 다른 소셜 아이덴티티와 맞닥뜨린다. 중산층 가정은 가전제품을 임대해 쓰지 않는다. 세탁을 할 때마다 비용을 지불하지도 않는다. 사용할 때마다 비용을 지불하는 형식의 무료 세탁기 서비스는 마치 세탁기가 없는 원룸 거주자가 먼 길을 걸어가 코인 세탁기에 동전을 넣어 세탁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 이 프리미엄 세탁기의 타깃 소비자들은 그들이 중산층인가를 의심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렉트로룩스는 이 간극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래서 프로젝트에 실패했다.
소셜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바뀌는 걸까?
소셜 아이덴티티는 생각보다 아주 쉽고 빠르게 형성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영국 랭커스터 대학 연구진이 실시했던 아주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연구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서포터스 몇 명을 섭외해 축구팬이 되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봤다. 이때 그룹의 절반에게는 '맨유 팬이 되는 것'의 의미를, 나머지 절반에게는 '(일반적인) 축구 열성팬이 되는 것'의 의미를 물어봤다. 질문에 대답한 이후 참가자들은 소그룹으로 나누어져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참가자들은 이동 중에 한 남자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물론 스턴트맨들의 연기였다. 스턴트맨들은 총 3가지 셔츠 중 하나를 입고 있었는데, 각각 맨유 유니폼, 맨유의 오랜 라이벌인 리버풀 유니폼, 그리고 일반적인 민무늬 티셔츠였다. 연구진은 이 부상자가 속한 그룹의 소속감과 도움을 받을 가능성 사이 상관관계를 확인하고자 했다.
결과는 기대대로였다. 맨유 팬으로서 의미를 질문받은 참가자들은 리버풀 유니폼보다는 맨유 유니폼이나 민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는 부상자를 더 돕고자 했다. 반면 일반적인 축구 열성팬이 되는 것의 의미를 질문받은 참가자들은 티셔츠의 종류 여부를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EPL 전통의 라이벌 맨유와 리버풀 / 출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페이스북
이 실험은 소셜 아이덴티티가 주변 상황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주변에 누가 있고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는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 잘 형성된 소셜 아이덴티티는 매 순간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결과도 도출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소셜 아이덴티티를 형성케 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마케터들이 소셜 아이덴티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마케터들은 소셜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이런 사실들이 마케터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소셜 아이덴티티가 의사결정을 만든다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은 고객들이 특정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개인의 '태도'보다는 '사회적 자아'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사람의 소속감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브랜딩하는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분명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회적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성격을 마케팅에 잘 활용한 대표 브랜드가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다. 2014년 9월까지 미국에서 판매된 하이브리드 차량 중 50% 이상이 프리우스였다. 누적 판매량에 있어서는 2위 혼다 '시빅'보다 약 7배 많다. 둘은 성능이나 연비, 가격 면에서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진정한 차이는 고객의 소셜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증명해주는 외관에 있다. 프리우스는 하이브리드 모델로만 제조됐고 외형도 도요타의 일반적인 가솔린차와 확연히 다르게 출시됐다. 반면 시빅은 자동차 뒷면에 '하이브리드' 표시가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봐야만 구분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프리우스를 구매하면 사람들은 큰 노력 없이도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환경보호 지지자'라고 보여줄 수 있다. 그 차이가 지금 둘의 격차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도요타 프리우스(좌)와 혼다 시빅(우) / 출처: 도요타 공식 페이스북(좌), 혼다 공식 홈페이지(우)
때때로 고객은 자신이 가진 소셜 아이덴티티와 상충하는 가치 제안을 하는 제품을 만나게 된다. 이 경우 영리한 마케터들은 더 건설적인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바셀린과 비누 등 유지 제품을 주로 생산하는 '유니레버'는 물 소비를 줄이는 캠페인 일환으로 훨씬 적은 양의 물로 세탁이 가능한 섬유 유연제 '콤포트원린스Comfort One Rinse'를 출시했다. 동남아 물 부족 국가가 주 타깃 시장이었고, 초기 시제품을 배포했을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출시를 하자 목표 매출량에 미달한 것은 물론이고, 구매한 소비자들의 물 소비량도 줄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지역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빨래를 한다. 이때 빨래하는 여성은 '부지런한 엄마'라는 소셜 아이덴티티를 가진다. 때문에 세 양동이 물로 빨래할 일을 단 한 양동이로 빨래하는 모습은 부지런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태국 담논사두악의 빨래하는 여성 / 출처: 네이버 미술백과 '김수남 기념사업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니레버는 '새롭고 건설적인 정체성'을 추가해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돈과 시간을 절약하는 현명한 살림법이 담긴 책자를 배포하고, TV 광고를 통해 빨래할 때 물을 적게 쓰는 주부가 현명하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그 결과 지난 3년간 동남아 국가에서 콤포트원린스 매출은 66%나 증가했다.
소셜 아이덴티티를 심어주는 데는 단 20분이면 충분하다
소셜 아이덴티티가 자칫 개인의 '신념'처럼 깊고 단단한 것이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셜 아이덴티티는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개인에게 안착시킬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특정 개인에게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발하기 충분한 소셜 아이덴티티를 형성시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 효과 발생은 기존 태도와는 무관하다. 예를 들어 평상시 환경 보호와 관련해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은 사람에게 적절한 질문과 환경 조성을 통해 실제 '환경 보호'와 관련된 행동을 하도록 만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이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소비자들이 특정 소셜 아이덴티티를 선택하도록 바꾸는 것뿐 아니라 심지어 새로운 소셜 아이덴티티를 심어주는 것도 놀라울 정도로 쉽다. 고객과의 소통과 브랜드 경험을 방해하는 소음의 대부분은 고객들이 소셜 아이덴티티라는 라디오 채널을 계속 바꾸기 때문에 유발된다. 마케터들은 매일매일 주파수를 새로 맞추는 작업에 참여하고 고객에게 새로운 소셜 아이덴티티를 제공하도록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업과 고객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을 명확히 하고 때로는 적절히 조정해야 한다. 그러면 고객들의 목소리는 모든 마케터들의 귀에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들릴 것이다.
-위 글은 네이버 비즈니스판에 실린 ‘세계적 경영 저널 HBR 2015년 1-2월호’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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